제목: 너무 한낮의 연애
작가: 김금희
출판사: 문학동네
어느 날 무심코 보게된 추천 도서 목록에서 김금희 작가의 '오직 한 사람의 차지' 라는 제목과 내용에 끌렸다.
도서관에서 검색했지만 없어서 같은 작가의 다른 소설인 '너무 한낮의 연애'를 빌리게 됐다.
단편 소설이다. 단편 소설에서 타이틀을 차지하는 소설은 보통 목록의 중간이나 그 뒷편에 자리잡는데, 그 중 '너무 한낮의 연애'는 특이하게 맨 첫 소설이다.
성급한 나는 그 첫 단편만 읽고 지금 리뷰를 쓴다. ( 나머지도 다 읽고는 내가 리뷰를 쓸 만큼 부지런할 자신이 없다. )
싱그러운 민트색 표지에 밝은 느낌을 준 제목과 다르게 내용은 전혀 밝지 않다. 현실에서, 주변에서, 일어 날 법한 일상의, 어두운, 우울한, 찝찝한 부분을 자연스럽게 묘사한다.
영업직에서 좌천당해 기술 관리직으로 좌천당한 필용.
그 날 이후, 그는 회사 점심시간에 회사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의 발길은 대학시절 기억 한켠에 자리 잡은 양희와 대화를 나누던 맥도날드로 향한다.
그 시절, 그 맥도날드에서 하루하루 담담하게 필용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다른 표현을 아꼈던 양희.
양희는 어제처럼 무심하게 대답했는데 그말을 듣자 필용은 실제로 탁자가 흔들릴 만큼 몸을 떨었다. "오늘도 어떻다고?" "사랑하죠, 오늘도." 필용은 태연을 연기하면서도 어떤 기쁨, 대체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불가해한 기쁨이었다.
그 고백을 당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우위와 자만에 빠져있다가
양희의 마음이 떠난 순간, 양희에 대한 마음을 깨닫는 필용.
그러고는 무작정 양희의 집에 찾아가지만, 찌들어가게 가난한 양희의 형편을 보고 그 마음은 다시 사라진다.
필용은 양희 뒤에 서서 양희에게로 손을 뻗어보았다. 닿지는 않았다. 앞으로 한 걸음만 더 옮기면 손이 닿을 수도 있었지만 필용은 그러지 않았다. 자신의 얼굴이 간절함으로, 연민과 구애의 감정이 뒤엉킨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다는 걸, 자기 자신만은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필용은 말없이 르망에 올라탔다. 문산까지 오는 동안 필용이 전율했던 사랑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주 뻥 뚫린 것처럼 없어지고 말았다. 필용은 울었다. 울면서 무엇으로 대체되지도 좀 다르게 변형되지도 않고 무언가가 아주 사라져버릴 수 있음을 완전히 이해했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몇 십년이 흐르고, 아내와 아들까지 있는 필용이,
그의 발길이 그가 아주 힘든 순간에,
양희와의 추억이 깃든 맥도날드로 향하고,
그 시절 작가를 꿈꾸던 양희가 쓰던 연극 제목이 걸린 소극장을 향하고,
그 소극장에서 연기를 하고 있는 양희를 발견하고는,
양희가 자신을 봐주기를 기대한다.
아내에게는 큰 불만이 없는데 아들은 소중한데. 그러니까 안 되었다. 필용이 양희를 볼 수는 있어도 양희가 필용을 봐서는 안되었다. 시선은 일방이어야 하지 교환되면 안 되었다. 교환되면 무언가가 남으니까 남은 자리에는 뭔가가 생기니까. 자라니까. 있는 것은 있는 것대로 무게감을 지니고 실제가 되니까.
결국은 연극의 마지막날, 머플러를 쓰고 극장을 찾아가 양희를 마주한다.
역시나 필용은 끝까지 양희를 아는 채 하지 못한다.
연극이 끝나고도, 무대인사가 끝나고도 대기실로 들어가지 않고 양희는 물끄러미 객석을(필용을..?) 쳐다보지만
결국 필용은 용기내지 못했다.
양희야, 양희야, 이제 피시버거는 안판단다.
양희야, 양희야, 너 되게 멋있어졌다.
양희야, 양희야, 너, 꿈을 이뤘구나. 하는 말들을 떠올리다가 지웠다.
안녕이라는 말도 사랑했니 하는 말도. 구해줘라는 말도 지웠다. 그리고 그렇게 지우고 나니 양희의 대본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도 어떤 것은 아주 없음이 되는게 아니라 있지 않음의 상태로 잠겨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남았다. 하지만 그건 실제일까. 필용은 가로수 밑에 서서 코를 팽 하고 풀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뭔가가 바뀌었을까. 바뀌면 얼마나 바뀔 수 있었을까. 가로수는 잎을 다 떨구고 서서 겨울을 견디고 있었다. 필용은 오래 울고 난 사람의 아득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 질문들을 하기에 여기는 너무 한낮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정오가 넘은 지금은 환하고 환해서 감당할 수조차 없이 환한 한낮이었다.
밝은 느낌의 제목을 주는 단편 소설은,
오히려 그 늘 반복되는 일상 속에 씁쓸한 면을 녹여내는 것이 많았던 것 같다.
'너무 한낮의 연애' 도 내겐 그런 소설인 것 같다.
힘든 환경에 치여, 살아온 양희의 꾹꾹 눌러담은 사랑표현 방식은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만 했던, 보여지는 모습이 중요한, 필용에게는 너무 커다란 벽이었다.
그는 양희의 세계를 받아들일 용기가 없었던 거다.
모든 것이 서툴렀던 어린 시절의 필용의 부끄러웠던 지우고 싶은 기억,
시간이 흘러서도 없었던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있지 않음의 상태로 있다가
마치 완전한 하나의 구(球)의 형태로, 그가 다시 부끄럽고 힘든 순간에 수면위로 떠올랐다.
나에게도 기억 속에도,
시간이 흘러 없어지지 않고 있지 않음의 상태로 잠겨진 '양희'가 있을까.
어떤 상황에서 나는 다시금 '양희'를 만나게 될까.
지금의 내가 충분히 단단해 진다면 '양희'를 만날 수 있을까.
반면에 모든 것을 포용하고 수용하며 담담히 받아들이던 양희는 어떤 마음이였을까.
하루하루, 사랑을 말하다가, 사랑이 떠났다 말해야 했던,
그 이후, 사랑했던 사람의 폭언을 듣고 갑자기 찾아와 나의 바닥까지 보여줘야했던 양희의 이야기는 어땠을까.